나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라디오 DJ를 하고 싶었다.
단어와 단어를 엮어 문장을 만드는 일, 글을 짓는 일은 정말 고귀하고 근사한 직업으로 보였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글을 짓는 것 중에 가장 으뜸은 소설로 세상을 창조하는 일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난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작고하신, 박영한(朴榮漢) 선배님의 아라베스크의 짜임새를 유심히 보았고, 첫 문장을 읽는 순간부터 앉은 자리를 뜨지 못 하게 했던, 1988년 이상문학상 수상작 임철우의 '붉은 방' 같은 소설도 적고 싶었다. 나는 사실 어린 시절 소설보다는 시(詩)를 더 좋아했는데, 그건 아무래도 김수영과 기형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의 유년시절은 라디오와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그다지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있지 못 해 주간활동이 제한적이었던 탓이었는데 밤 늦은 시각까지 잠을 자지 못 했던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 때 난 집에 있던 라디오에 전파를 맞춰가며 이런저런 방송을 들었다. FM 영화음악실이나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는 아직 머릿속에 DJ들의 목소리가 고스라니 남아 있다.
어학공부용으로, 당연히 그랬겠지만, 가지고 있던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는 라디오 기능도 함께 제공되었는데 - 내 것은 삼성 '마이마이'였다 - 덕분에 밤이 깊어지지 않아도 라디오를 들을 수 있었다. 이수만의 팝스투나잇, 이수만과 함께는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물건너 바깥의 최신 팝을 가장 빠르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이어 받은 (가수 이수만은 DJ를 그만 두고 현재의 SM 엔터테인먼트를 만들었다, 그를 연예사업으로 이끈 건 그가 만든 곡 이지은의 '러브 포 나잇'이었지 않았을까) 프로그램이 '배철수의 음악캠프'였다. 내 기억이 맞다는 배철수의 음악캠프의 첫 곡은 '뉴키드 온더 블록'의 '스텝 바이 스텝'이었을 것이다.
DJ는 멋진 직업처럼 보였다. 그런데 난 그들처럼 그렇게 다양한 지식과 음악에 대한 큰 애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자신이 없었다. 지금의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거짓말!'이라고 잘라 말하겠지만, 학창시절의 난 말을 정말 못 했다. 완전한 한 문장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도 힘들었고, 글을 소리 내어 읽는 것도 쉽지 않았다.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영원이 그렇게 살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바로 이 사람이 증거이니까.
그래서, 난 말하지 않는 DJ를 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공중파에서 이런 사람을 써주지는 않을 것이 분명해서 나중에 소설가로 성공하면 돈을 들여 작은 지역 방송국 하나를 운영해 보고 싶었다. 그렇게 난 두번째 꿈을 꾸며 긴 인생의 항로를 잡고 있었다.
나는 지금, 30년 가까이 IT 업계에서 그저 그런 직장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가끔 오랜 친구를 만나면 내가 직장인으로 월급을 받고 사는 모습을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무튼 밥벌이 하고자 시작했던 일이 이렇게 될지는 나도 몰랐다.
시스템 아키텍처는 사실 잘 짜여진 소설만큼이나 유기적이고, 코드는 시와 다름이 없어 보인다. 데이터센터는 색인이 잘 된 도서관만큼이나 하모니가 느껴질 때도 있다. 어르신들이 '인생은 무엇이다'라는 말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만 같다. 어느 정도 세월이 흘러 세상을 몇 걸음 뒤에서 보게되는 여유가 생기면 혹은 그럴 만큼 현실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면 지나온 모든 것이 비슷비슷해 보이는 이유이지 않을까?
이 나이에 인생의 항로를 바꾼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코밑에 수염이 자라기 시작할 무렵의 나는 어떤 인생을 살기 원했는지 기억해 버렸다. 시간은 너무 빨리 가고 나는 너무 게을렀고 세월은 정말 야속하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