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17, 2023

모나크 그만 보기로 했다 - Monarch: Legacy of Monsters

반가웠다

테이프 카트리지는 정말 오래간 만에 봤다. 향수가 밀려와 쓰나미가 되었다. 신입 시절 내가 가장 재미있어 했던 것이 테이프 스토리지들이었다. 릴(reel) 테이프부터 DAT까지 애정을 듬뿍 주던 매체였다. $ tar cvf /dev/rmt/0 `pwd`/* 그 중에 QIC-24를 정말 좋아했다. 특유의 무게감이나 드라이버에 로드될 때의 기계작동 소리는 키보드를 두들겨 명령어를 입력할 맛이 났다. 바람소리 쉭쉭 나는 릴 테이프나 장난감 같았던 DAT와는 다른 감각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업계에 발을 딛게 되었을 대에도 QIC는 희귀해지기 시작했을 때여서 더 애정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릴 테이프도 매력적이었는데, 종일 골방에 갇혀 릴 테이프의 데이터를 DAT로 이전하는 삽질을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없는 날 동안 계속 하게 된 경험만 없었다면 최애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깜짝 놀랐다

주인공의 배다른 형제의 전 여자친구는 테이프 카트리지를 뜯어서 무명 가수의 버려진 데모 (릴) 테이프를 걸어 보는 느낌으로 어떤 곳에 걸고 최신 컴퓨터로 읽어들인다. 그리고 암호화 되어 있다는 걸 단박에 알아차리고 인터넷에서 복호화를 위한 키를 다운로드 받아서 암호화를 해제했다. (뭐?! 뭐라고??)

테이프 드라이버는 매우 정교한 장치이다. 속도 제어에서 해드의 역할까지 많은 부분이 직소퍼즐처럼 딱 맞게 돌아가야 한다. 카트리지를 뜯어서 테이프를 꺼내어 아무데나 걸어 본다고 내용을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철수의 워크맨으로 녹음한 테이프를 영희네 전축에 집어 넣어서 들을 수 있는 그런 매체가 아니란 말이다.


머리를 맞은 듯 했다

70년대 저장된 테이프 카트리지가 멀쩡하게 전자기적 특성을 현재까지 유지한다는 것은 마치 진나라 시황제가 불로초를 먹고 지금까지 살아서 대륙을 통치하고 있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거기에다가 이 놈은 (아마도) 오랫동안 바닷물에 쩔어서 대양을 헤매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테이프의 데이터가 살아 있을 확률은 진나라 시황제가 불로초를 먹은 뒤로 지금까지 단식 중인데, 여전히 건강하게 대륙을 통치하고 있는 것과 같다.


미친 듯이 웃었다

70년대 QIC라면 - 아무리 돌려봐도 QIC 맞다 - 20MB 정도 저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혹은 그 보다 더 많이 저장할 수 있다 하더라도, 두 배를 넘지 못 했을 것이다. 1990년에 출시된 SunOS 4.1.1이 수록된 QIC-24 테이프 카트리지의 용량이 아마도 60MB? 

ok> boot tape


이 용량의 테이프 스토리지에서 고해상도 사진, 문서, 지도 모두 엄청난 수량과 현재 시점에도 놀랄만한 속도로 데이터 로딩이 되었다. (현실 고증을 한다면 컵라면을 다 익혀 먹고 담배 한 대 핀 다음 남은 국물을 원샷하면 첫 번째 파일을 볼 수 있을 것이다) 70년대에 고해상도 디지털 사진과, 총천연색 데이터 스캐닝과, 각종 종이 문서를 이미지 파일로 변환하여 저 좁디 좁은 테이프에 저장하기 위해 도대체 어떤 류의 기술을 어떤 디바이스에서 사용했단 말인가? 


이 시리즈는 성실하지 못 한 작품이다.

영화든, TV 시리즈이든, 뭐든 간에 앞 뒤가 맞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소위 말해서 ‘세계관’이라는 것을 만들어 낸다면 말이다. 고질라 시리즈는 비현실적인 괴수들이 ‘지금’ 우리가 가진 여러가지 방법으로 물리치는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거나, 그에 걸 맞는 괴수급의 생명체들이 등장하여 재난 판타지를 만들어 내면 된다. 고질라는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기 정말 좋은 소재로 많은 고질라(류) 영화와 TV 시리즈들이 서로 다른 컨셉을 가진 이유이기도 하다.

난 그 중에 '고질라: 싱귤러 포인트'와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신 고질라 (2016) シン・ゴジラ'를 좋아한다. 둘 다 고질라라는 소재를 가지고 개성 가득한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만약, 모나크라는 단체가 70년대에 오버 테크놀로지를 영위하던 특별한 단체라면, 영상 초기에 등장하는 그 테이프 스토리지 소유자가 손에는 8mm 카메라 대신 MD와 같은 광학매체에 영상이 저장되는, 쌔끈한 디지털 캠이 있으면 되었고, 각종 현대의 과학기술을 초월하는 장비들이 주머니와 가방에 있었다면, QIC로 보이는 그 테이프 카트리지가 겉보기와는 다른 특별한 무엇으로 여길 수 있다.

그리고 주인공의 배다른 형제의 전 여친의 집에서 철 지난 데모 테이프 취급할 수 있는 데이터가 아니라, 특별한 장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찾으러 가는 과정에서 모나크가 이들에게 그 테이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이런 빌드-업은 조금만 신경 쓰면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는 - 다시 말하면, ‘기본기 속에 녹아 있어야 할 성실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난 실소를 거듭하면서 이 TV 시리즈는 시간을 투자해서 볼만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Monarch - Apple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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