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September 27, 2016

어쩌다 그 곳 - 화견소로 花見小路 하나미코지

그러니까, 2010년 봄, 교토[京都]로 가게 되었다. 한 신문사의 일본특파원과 전자우편을 주고받을 정도로 세상을 향해 활력 있게 다가가던 때였다. 철학의 길[哲學の道]을 걷게 된 것도, 화견소로, 하나미코지[花見小路]에 가게 된 것도 순전히 활력 넘치는 호기심과 체력 덕분이었다.

화견소로는 두 번 걸어 보았다. 한 번은 2010년 봄이었고 한 번은 2015년 가을이었다. 그 시간의 차이 속에 현격하게 다른 것을 느꼈다면 그 거리의 중국인 관광객 비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점의 차이와 협소한 개인적인 체험이 일반화 될 수는 없겠지만, 2010년 봄에는 중국어를 전혀 들을 수 없었다고 기억하고 있고, 2015년 가을에는 중국어 이외 다른 언어는 듣기가 어려웠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화견소로는 2010년 봄이다. 그 길에서 난 시간여행을 하는 듯 신비로운 체험을 했으며, 한적한 곳이 노을과 함께 활력을 얻어내는 신비도 목격했다. 종종걸음의 기모노 차림의 여성과 어느 사진관에서 나온 초로의 사진사가 공들이던 촬영도 지켜볼 수 있었다. 화견소로에서 옆으로 뻗은 작은 골목들 사이에서도 옛 정취를 느낄 수 있었고, 저기 멀리 나지막하게 들리는 중년여성의 대화도 정겨웠다 -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난 그 길에서 최대한 천천히 걸었고, 해가 지는 시간 속에서 오늘과 수십년 전 과거를 오갈 수 있었다.

내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화견소로는 2015년 가을의 그곳이다. 2010년 봄과 같은 시간대에 그곳에 갔다. 입구부터 일단 인산인해와 깃발을 따라다니는 단체 관광객 그리고 차와 사람이 얽혀 있는 길이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한적함은 찾을 수 없었던 그 길에는 정겨운 대화는 사라졌고, 중국어와 한국어가 뒤섞인 고성이 가득했다.

실내복인지 잠옷인지 외출복인지 모를 옷을 걸친 가족 단위 중국인들 그리고 히말라야를 등반할 준비를 마친 한국인 중년주부들의 계모임으로 완전히 점령당한 그 거리는, 상해(上海)의 남경로(南京路)인지 서울의 명동(明洞)인지 나는 구분할 수 없었다. 내가 기대했던 시간여행커녕 공간이동을 당해 버렸다.


나는 그 길을 좋아했다. 그 길에서 피어났을 수많은 이야기들을 상상했고, 그 상상은 좋았다. 오래전 선물받아 잘 읽고 간직하고 있는 일본 근대를 배경으로 한 단편 소설들을 마음대로 기억에서 꺼내어 가져다 붙이며 즐거워 했던 2010년 봄이 그리웠다.

Thursday, July 28, 2016

어쩌다 이 책, 나는 항상 옳다 - 길리언 플린

나는 항상 옳다[The Grownup]. 길리언 플린(Gillian Flynn), 우리에게 '영화'로 더 유명한 소설, 나를 찾아줘[Gone Girl]의 저자(著者)이다.

매우 짧은 소설이다. 한 쪽 당 단어 수는 웬만한 책의 1/3 쪽에 수록될 만큼 적다. 그리고 총 쪽수는 100이 되지도 않는다. 얼추 생각해 보면, 일반적인 책의 20장 정도 40쪽 미만에 수록될 내용이다. 퇴근 길에 잠깐 들린 서점에서 샀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기 전에 다 읽었다.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풀어낼 때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었다. 수음(手淫)을 돕는 직업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고 '책'을 디딤돌로 삼아 능숙한 거짓말을 구사하는 점쟁이로 넘어갔다. 점쟁이라는 장치에 필연적으로 따라와 버린 퇴마와 귀신들린 집은 지루함을 만들어 낼 뻔도 했지만, 다행히 익숙한 결말로 내닫지는 않았다. 몇 번의 작은 반전 같은 장치가 있은 후에 이 이야기는 다시 '책'을 짚고 일어서서 종국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매우 낯선 독백으로 책은 끝난다.


확실히 분량은 한 권으로 묶어 내기에는 부족했다. 하지만, 마지막 몇 페이지는 분량의 문제를 걷어 내려 했다. 순식간에 마침표를 맞이한 이야기는 독자가 상상을 완성하기도 전에 소설이 끝나는 낯선 경험을 해야 한다. 속도감은 정말 뛰어 났지만, 이게 최선인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Friday, July 22, 2016

오픈소스, OpenPOWER 그리고 GPU

변화와 혁신의 진원, 오픈소스 운동과 OpenPOWER 그리고 GPU로 여는 새로운 컴퓨팅의 세계

세상은 변하고 있습니다. 지난 세대도 지금의 세대도 앞으로의 세대도 변할 것임이 분명합니다. 이런 일반원칙이 가장 잘 적용되는 곳이 바로 IT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초기의 컴퓨팅 환경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한 번의 연산을 수행하기 위하여 책상 위에서 완성한 코드가 적힌 공책을 손에 쥐고 키 입력의 순서를 기다리는 프로그래머들의 모습은 구텐베르크 혁명 이전의 시대, 세상에 몇 없던 도서관에서 중요한 서책의 한 부분의 필사를 원하는 수도사들과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네트워크 장치와 통신 방법의 발전과 일반화로 변하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의 협업과 세속적 이윤을 추구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로 조금씩 보편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거의 모든 컴퓨터가 항상 온라인 상태를 유지하고 심지어 지금 우리의 호주머니 속에 있는 휴대전화도 매우 훌륭한 정보단말기로서의 역할을 온종일 수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통신의 발전은 컴퓨팅이라는 일반연산 수행 방법과 결과 조회의 상황에 많은 변화를 주었습니다. 서버 없는 서버 설계가 가능하게 되었고, 소유하지 않으면서 정보를 생성하고 조회하고 가공하여 가까운 미래를 누구보다 먼저 예측할 수 있는 사업 모델을 만들어 낼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발전은 매우 급진적이고 눈부셔서 당장 다음 세대를 예견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 되었고, 어쩌면 다음 주의 IT 헤드라인이 무엇이 된다 하여도 아무도 놀라지 않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혁신에 혁신을 더 하고 그 혁신이 창조적인 방법을 만들어 내고 창조적 방법들이 미래를 오늘날로 당겨오는 과정을 빠르고도 빠르게 진행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혁신의 주체는 과연 누구일까요?
아무도 아닐 수 있을 만큼 모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종례의 시간에는 비즈니스 리더쉽에 의존한 몇몇 독점적 특허와 판매 모델로 무장한 소수의 사람들이 부를 장악하고 그 장악력을 바탕으로 자신이 제어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새로운 제품을 시장에 소개함으로써 기술의 방향성을 설정하고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습니다. 몇몇 건전한 기업은 이를 통하여 전인류의 복리에 기여했겠지만, 대부분의 기업은 독점적 지위에 편승한 제한된 혁신을 매력적인 제품에 차등 주입함으로써 가까운 미래를 먼 미래로 돌려 보내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혁신은 이와 같지 않게 되었습니다. 전세계에 산재(散在)되어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소리를 내던 해커들이 차근차근 이어온 오픈소스의 작은 혁명은 새로운 협업의 좋은 예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기업들은 보다 개방적 혁신을 세상에 제공하기 위하여 이러한 사상을 수용하였습니다. 그렇게 오픈소스 프로젝트는 보다 실속 있고 현실 세계의 변화를 주도하는 주효한 역할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세상 지금의 IT의 혁신은 바로 이 오픈소스 운동에 기반한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오픈소스 운동은 70년대를 거치면서 자가개발 운영체제에 탄생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최초의 설치가능한 운영체제와 소프트웨어는 모두 오픈소스였다고 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오픈소스 운동은 소프트웨어의 발전 동력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픈소스 운동은 운영체제 커널을 비롯한 각종 소프트웨어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드웨어 그것도 가장 핵심적인 중앙처리장치(CPU)에서도 이미 진행 중입니다.

IBM은 수년 전 자사의 가장 핵심적인 기술 중의 하나인 Power 프로세서를 오픈소스로 기술을 공개했습니다. 바로 OpenPOWER가 그 이름이고, 이를 유지하기 위한  재단도 설립하였습니다. 원천기술을 제공한 IBM을 비롯한 NVIDIA, Google, Mallanox, Tyan그리고 우리에게도 익숙한 삼성전자가 함께 시작한 이 OpenPOWER는 현재, 전세계 주요 IT 회사들 뿐만 아니라 연구소 등 단체와 개인들이 참여하여 함께 꾸려가는 또 하나의 거대한 오픈소스 프로젝트가 되었습니다.

단순히 CPU 설계 기술을 공개했을 것만 같은 이 오픈소스 프로젝트는 리눅스가 기반하는 컴퓨팅의 자유를 더 넓은 세상으로 확대하게 되었고, 주요 배포판 제작사들이 모두 참여하는 든든한 바탕이 완성되었으며, 이러한 결과로 IT 인프라를 설계하고 주요 워크로드의 적절한 배치를 고민하는 기획자들에게 유효한 선택자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아주 좋은 사례로 Google이 자사의 IT 인프라에 OpenPOWER를 선택했다는 것에서 찾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더 빛나는 결과는 이제 곧 펼쳐질 예정입니다.

GPU, Graphic Processing Unit은 과거 단순한 연산의 결과를 화면에 출력하는 프레임버퍼 역할에서 독자적인 연산 즉, CPU와 버금가거나 어쩌면 그에 우월하는 일반연산 영역까지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1999년 이 장(章)의 첫 쪽을 멋있게 연 Nvidia는 GeForce라는 이름을 게임을 즐기는 한정 사용자 뿐만 아니라 IT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사람들에게까지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누구보다도 앞서서 혁신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1999년 이후 거듭 세상을 놀라게 했던 GPU는  그래픽 출력의 영역을 일찍이 넘어 CPU와 더불어 연산의 차원을 확장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CPU의 발전의 제한을 GPU를 통하여 뛰어넘는 결과가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Nvidia는  NVLink라는 놀라운 버스 기술을 선보였고, Pascal마이크로아키텍처를 바탕으로 하는 GP100 GPU를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세대의 GPU, Pascal 마이크로아키텍처를 완성하는 NVLink는 OpenPOWER 재단을 중심으로 IBM과 Nvidia의 수 년간의 협업을 통하여 완성되었으며, 곧 출시될 코드네임, Minsky로 알려진 최신 Power Systems에 세계 최초로 탑재됩니다. 오픈소스 혁신은 이렇게 하드웨어의 영역에서도 빛나는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NVLink는 CPU와 GPU 간 데이터 교환을 PCIe 인터페이스를 거치지 않고 CPU와 GPU 그리고 GPU와 GPU가 직접 통신할 수 있게 설계된 새로운 버스입니다. NVLink의 최대 대역폭은 80 GB/s로, 16GB/s인 최신 PCIe 3.0과 비교하여 5배나 빠른 속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송 bit당 소모 전력은 PCIe 버스에 비해 낮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Power Systems는 NVLink로 완성되는 GPU의 혁신을 가장 먼저 세상에 선보입니다. 서버의 최고 성능을 담보하는 고차원 컴퓨팅의 가능성을 직접 만날 수 있습니다. 특히, 미국 에너지부(Unite States Department of Energy; DoE)에서 NVLink를 기반으로 하는 'Summit'과 'Sierra'라고 알려진 두 종류의 수퍼컴퓨터를 IBM과 Nvidia를 통하여 공급받기로 계약을 했다는 보도는 제품이 아직 출시되지 않았음에도 이 기술에 대한 높은 가능성을 실증하는 사례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OpenPOWER 재단의 IBM과 Nvidia가 여는 새로운 컴퓨팅의 세계에서 우리는, 고성능 연산(HPC)과 딥러닝(Deep Learning)으로 이상과 현실의 경계를 보다 모호하게 만들 것이며, 먼 미래로 약속했던 발전의 이정표를 가까운 시간대로 수정하는 멋진 일을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어느 회사의 온라인 잡지에 수록되는 것을 전제로 청탁받아 기고한 글을 여기에도 게시함)

Sunday, June 26, 2016

아가씨 The Handmaiden (2016)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장면 장면 ‘박찬욱’이라고 외친다. 내가 사랑하는 감독, 봉준호 감독은 반면, 재밌지? 나도 재밌게 만들었어! 라는 느낌이다. 이번 영화는 박찬욱이 '박찬욱'을 덜 외친 영화이다.


아가씨를 봤다.
엄청나게 아름다운 장면에 거의 압도되었다.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 이후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는 김민희가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배우인지 여실히 들어낸 영화였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이야기가 재밌다.

아가씨를 봤다.
너무도 친절해진 감독은 ‘박찬욱, 박찬욱’을 살짝 감추는 대신 불필요하게 친절해진 면이 있었다. 그렇다, 조금 지루했다. 그것만 제외한다면 그의 영화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박쥐’ 뒤로 이 영화로 놓을 수도 있겠다. ‘아가씨’와 경쟁해야 하는 영화는 ‘복수는 나의 것’이다.

아가씨는 멋진 영화였다.
연출도 대사 한 마디도 컷과 컷 사이 스쳐지나 가는 백작의 말아 피운 담배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했다. 불필요하게 배치한 장치 하나 없이, 작고 큰 의미가 가득한 멋진 영화였다. 그 멋진 부분들 사이를 가장 아름답게 채워낸 것은 김민희의 연기였다. ‘화차’ 이후 그녀는 우리 영화사에 이름을 남길 준비를 마쳤고, 아가씨는 아주 오랫동안 김민희라는 이름과 함께 분명 언급될 것이다.



원작 소설, '핑거 스미스'를 읽고 있었다.
난 영화를 보기 위해서 책을 먼저 읽으려고 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팟캐스트, ‘빨간책방'의 ‘핑거 스미스’ 편도 아직 듣지 않았다. 책을 모두 읽고 영화 보고 팟캐스트를 들으려 했다. 하지만, 책은 다 읽지 못 했고, 영화를 봤다 - 이번이 아니면 극장에서 못 볼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할까, 혹은 내가 너무 게으른 나머지 완독하지 못 할 것만 같았다. 원작 모두를 읽지는 못 했지만, 영화는 참 원작을 잘 각색했다는 생각을 했다. 간결하게 필요한 부분을 적절히 가져와 재가공하여 새로운 이야기로 탄생시켰다. 일제강점기로 시대를 이동시킨 것부터 일어와 국어의 혼용, 숙희 · 옥자 · 타마코 그리고 각 인물의 처한 현실까지 과감한 각색과 연출을 행한 박찬욱의 승리였다. 그래서 난 박수.

참, 봉준호 감독의 다음 영화는 '옥자'이며 내년 초에는 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사진출처: 영화 아가씨 공식 홈페이지)

Friday, June 17, 2016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 Warcraft: the Beginning (2016)

원작이 있는 영화가 꼭 원작을 따를 필요는 없다. 영화는 원작을 모르는 관객도 상대해야 하고, 특히나 원작이 매우 방대하고 복잡하며 팬들 조차 해석에 따른 의견이 분분할수록 더욱 그러하다. 극장에서 상영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적당히 잘라내고 중요 사건을 부각시켜 극적인 재미를 배가 시키는 것이 원작을 그대로 옮기는 것보다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는 것이 또 다른 버전을 탄생시키는 - 그러니까, 재창조의 재미라고 할 수 있다, 제작하는 입장에서도 관람하는 입장에서도.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 이런 관점에서도 완전히 망한 영화이다. '워크래프트 팬들은 만족하겠지만…'이라고 누군가는 평론에서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열렬한 팬인 나는 차원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실망했다.

이것은 영화이고, 앞서 말한 것처럼 각색이 필요하다. 그래서, 일단 원작이라고 불러야 하는 ‘워크래프트: 오크 對 휴먼’부터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드레노어의 전쟁군주’까지의 게임 스토리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도 팬의 입장에서 허용할 수 있는 범위 속에 넣을 수 있다. 그럴 수 있다. 게임은 게임이고, 영화는 영화이니까. 물론 소설도 있지만, 게임을 이끌거나 그 뒷 이야기를 다듬는 역할이니까...



그래도,
워크래프트 세계관의 절대적인 악의 축 역할을 하는 '간악한' 굴단이 너무 얕게 나온 것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호드'와 '얼라이언스'의 성립에 대한 설명도 없이 너무 빨리 그 설정을 가져다 쓴 것은 실수에 가까웠다 - 보통의 관객은 '오크'에 익숙해 지려 하는데 난데 없는 '호드'의 등장에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미국식 영화에서 흔하게 나오는 '엄청난 일을 겪다가 한가해 지면 센티멘탈해져서 자신의 과거사를 묻지도 않았는데 쏟아내는 장면'도 빠지지 않았다. 왜 항상 모닥불을 피워 놓고 둘러 앉아 그러는지.
특히나 이야기 전반을 이어가는 중심역할을 하는 캐릭터로 '가로나 하프오크'를 선택한 것은 과연 괜찮은 선택인가?에 대해서는 논란거리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녀의 역할을 탄생 비하를 뜯어 고치면서 까지(특히, 자식까지 낳게 된 그녀의 파트너인 메디브를 은유적인 방식으로 아버지로 바꾼 것 그리고 하프오크가 드레나이 어머니와 오크 아버지가 아닌 오크 어머니와 인간 아버지로 설정한 것에 대한 당황스러움) '인간'과 '호드'의 가교 역할로 부여할 필요가 있었는가? 아마도 제작자나 작가나 감독은 언어가 다른 두 종족간의 통역과 마음 깊은 곳에서 알 수 없이 들어나는 친근함을 이끌어 내는데 '가로나'라는 캐릭터를 활용 – 그렇게 하면 많은 고민을 해소할 수 있다 생각해서 그런 설정을 했으리라. 어쨌든 '가로나'가 '레인 국왕'을 죽이는 것은 결과적으로 원작과 같은 결론이라는 것은 참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 살인은 모두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는 점도. (원터 솔저가 아니라, 가로나였어! 스타크! 아... 바리안? 아! 아니구나, 미안)


그런데,
‘스랄’의 본명, ‘고엘’을 아버지, 듀로탄이 지어준다고? (영화를 기준으로 하면) 홀홀 단신 서구의 어느 신화처럼 바구니에 담겨 강물에 떠내려가 어느 인간 손에 길러지다 나중에 이름을 얻는데, 그 이름이 아주 우연히도 죽기 직전 아버지 듀로탄의 작명과 같다고? 아 이러지는 맙시다. 그냥 원작 설정처럼 이름없는 오크로 자라는 것이 더 좋다. 굳이 듀로탄의 아들이 고엘이라고 알려주지 않아도 되었다. 팬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고, 보통의 관객은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니까.
다음 편 영화(가 제작되지 않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에서 스랄의 어머니이자 듀로탄의 아내인 드라카가 도주 중에 얼라이언스의 공용어를 신속히 배워 쉬지 않고 질주하는 동안 지필묵을 구해 ‘이 아이의 이름은 고엘입니다’라고 적어 바구니에 넣는 설정 따위가 들어가면 영원히 그 영화를 저주할 것이다.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멋진 영상미와 잘 짜여진 이야기 박진감 넘치는 액션으로 채워졌다면 이런 불만 따위는 뒤로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딱 세가지로 추려 낼 수 있다.
  1. 배우들의 시선처리 혹은 없는 대상을 향해 흔들어버린 어색한 검.
    배우들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그려질 ‘안 보이는 대상’ 앞에서 대사와 시선처리에 대한 어려움을 스크린으로 그대로 옮겨 주었다. 보는 내가 다 안스러워 걱정까지 했다.
  2. 어느 곳에도 엑센트를 찍지 못한 스토리.
    이런 식의 전개는 시종 나를 지루하게 만들었다. 원작으로 살리지도, 멋진 각색도 못 한 상태로 영화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3. 불편한 캐릭터 소비.
    앞서 언급한 스토리와 캐릭터의 설정에 덧붙혀서 메디브도 안타까운 캐릭터이다.
    로데론이 폐허가 되지도 않았고, 아서스가 서리한의 유혹에 넘어가지도 안은 상태에서 메디브를 퇴장시킨 것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메디브 만큼 갈등을 잘 유발시킬 캐릭터도 없는데, 메디브 만큼 극적 긴장감을 불어넣을 만한 캐릭터도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일리단이 불타는 군단을 막으려 했는데, ‘우리’가 공대를 꾸려 검은 사원으로 쳐들어가 일리단을 ‘잡아’버리는 바람에 일을 그르치게 되었다는 식의 설정이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군단’ 확장팩에서 공식화 되고(WTF), 더 이상 새로운 반찬을 낼 수 없자 이미 끓여 먹은 사골국을 다시 끓여 조미료만 잔뜩 넣은 (그 놈의 시간여행) 드레노어의 전쟁군주에서 세계관을 뒤틀고, 첫번째 와우 확장팩의 배경이 되었던 아웃랜드와 일리단의 찌질한 모습도 사실 팬들에게 당혹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블리자드 너희들이 '아직 준비가 안 된 것'이라 생각한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라는 신세계를 열어준 ‘오리지날’과 아서스 매네실의 가슴 깊이 요동치는 스토리가 묻어있는 ‘리치왕의 분노’가 가장 견고하고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고, 그 이전에는 워크래프트 3가 그러했다. (역시 나는 아서스 에피소드를 사랑하나 보다. '아서스! 나예요, 제이나!')
이렇게 원작이 되는 워크래프트-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도 자신의 설정을 뒤틀고 뒤집는 것이 빈번해서 어쩌면 영화의 스토리가 그리 되어버린 것에 대하여 뭐라 말하는 것 자체가 우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영화 속에서 카드가가 '양변'했을 때(미개한 생물에게만 통한다고? 무한 양변 당했던 난 ... 뭐?)와 메디브가 까마귀 옷을 입고 지팡이를 들었을 때, 꼬마 바리안을 보게 되었을 때 그리고 '아 카라잔 주위가 저렇게 황폐화 되었구나'라고 설득 당했을 때는 박수를 치고 싶었다. 그래도 무엇보다 가장 멋진 장면은 '블리자드' 로고가 등장했을 때였고 (얼어붙은 알파벳 속에 인간형상의 무언가가 들어가 있었다니) 영화 시작과 동시에 등장한 인간과 오크의 일대일 전투는 정말 멋졌다. 'For the Horde!'라는 외침은 가슴을 충분히 요동치게 했고 'Azeroth'가 '애저라'라고 발음될 때의 어색함은 또 다른 재미였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칭찬해 주고 싶은 것은, 게임에 등장한 '한국어판' 지명과 호칭 그리고 그 세계관 속의 언어들을 잘 가져와 썼다는 점이다. 영화가 다 끝났음에도 어색한 번역을 찾기는 매우 힘들었다.
참, 멀록이 나오긴 했는데 봤는가? 아옳옳옳옳 울어주는 덕분이 뒷태를 볼 수 있었다.

이 영화제작으로 블리자드가 경영의 어려움에 처해 더 이상 팬들을 만족 시켜줄 수 있는 게임을 만들 수 없게 된다면 '전쟁의 서막'이 아니라, '재앙의 시작'이 될 것이다. 내가 우려한 것보다는 잘 만들어졌지만, 팬으로서도 일반관객서도 만족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었다. 워크래프트의 세계관을 잘 다룰 수 있다면 그 어떤 소재의 대작 혹은 연작 영화보다 훌륭한 그래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작품이 될 수도 있을 터인데, 안타깝기만 하다.

극장을 나서면서 MCU를 생각하게 되었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만들어 가는 마블 스튜디오는 정말 영리한 곳이다.

(스크린 샷 출처: UPI Korea Facebook)